패전의 순간, 지도자는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뉴스임팩트=최진우 전문기자] 병자호란의 눈보라 속으로 들어간다. 황동혁 감독의 〈남한산성〉(2017)은 단순한 사극이 아니다. 조선이라는 국가가 무너지는 그 찰나에, ‘전쟁’의 본질을 철학의 언어로 묻는 작품이다. 왕은 흔들리고, 신하는 갈라지며, 백성은 얼어 죽는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조선은 ‘항복이냐, 존엄이냐’의 갈림길에 선다.
▌ 이념의 전쟁이 아닌, 철학의 전쟁
영화는 전투 장면보다 대화에 집중한다. 남한산성 안, 왕 인조(박해일)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두 신하 사이를 오간다. 최명길(이병헌)은 현실을 본다. “백성을 살리려면 항복해야 한다.” 반면 김상헌(김윤석)은 명분을 지킨다. “나라의 기개를 꺾을 수는 없다.”
이 대립은 단순한 정치 논쟁이 아니다. 이념이 아닌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묻는 철학적 충돌이다. 영화는 이 두 사람의 논쟁을 통해 묻는다.
“국가란 무엇인가, 백성을 위한 것인가, 명분을 위한 것인가?”
이 질문은 17세기 조선을 넘어 21세기 한국에도 이어진다. 경제, 외교, 안보의 위기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굴복이냐, 자존이냐’의 질문 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 조선의 겨울은 지금 우리의 거울
황동혁 감독은 눈 덮인 산성과 차가운 색조를 통해 패전국의 정서를 시각화했다. 인조의 눈빛은 공포로 얼어붙고, 백성의 시신은 눈 속에 묻힌다. 전쟁은 이미 끝났지만, 왕과 신하의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전쟁은 총칼이 아니라 ‘말’로 이뤄진다. 외세의 압박 앞에서 국가의 존엄을 어디까지 지킬 수 있는가. 이 물음은 냉전 이후, 미·중 패권 사이에서 흔들리는 오늘의 한국 외교에도 겹쳐진다.
▌ 항복의 정치학, 존엄의 윤리학
〈남한산성〉이 특별한 이유는 승리의 서사가 아닌 패전의 철학을 그리기 때문이다.
최명길의 항복은 배신이 아니라 생존의 논리이고, 김상헌의 저항은 용기이지만 동시에 고립이다.
황동혁은 이 모순을 어느 한쪽으로 단정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무릎 꿇는 순간, 우리는 진정 패배한 것인가?”
▌ ‘패전의 미학’이 던지는 오늘의 메시지
전쟁이 끝난 자리에는 늘 질문이 남는다. 승리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패배를 택했는가’라는 것이다. 〈남한산성〉은 바로 그 질문으로부터 출발한다.
전쟁은 언제나 권력의 언어로 시작되지만, 끝은 인간의 언어로 맺는다. 황동혁의 카메라는 눈발 속을 천천히 걸으며 이렇게 속삭인다.
“패배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기억해야 할 철학이다.”
평점: ★★★★☆ (5점 만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