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성 대신 첩보전, 베를린 무대로 치열한 전쟁
CIA와 KGB의 그림자 대결, 냉전시대 상징
[뉴스임팩트=최진우 전문기자]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전 세계는 다시 긴장 속에 휘말렸다. 이번에는 총성이 울리지 않았지만, 갈등은 오히려 더 치명적이었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초강대국은 핵무기를 앞세워 서로를 견제했고, 그 사이에서 정보기관이 전면에 등장했다. 바로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다. 이들의 대결은 냉전 시대를 상징하는 ‘그림자 전쟁’이었다.
냉전은 단순한 체제 경쟁을 넘어 인류 전체의 생존을 위협했다. 양측 모두 핵무기를 보유한 상황에서 직접 충돌은 곧 ‘상호 확증 파괴(MAD)’로 이어졌다. 따라서 실제 전투 대신, 상대를 예측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정보전이 핵심 무대가 되었다. CIA와 KGB는 바로 이 보이지 않는 전선의 주역이었다.
냉전의 최전선은 베를린이었다. 동·서로 갈라진 도시는 사실상 거대한 첩보의 실험장이었다. 베를린 장벽은 물리적 경계였지만, 양측 첩보원들은 장벽을 넘나들며 정보를 주고받았다. 이중간첩이 활개쳤고, 정보원들의 밀고와 배신이 반복되었다. 베를린은 ‘첩보 수도’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영화와 소설 속 수많은 스파이 서사의 무대가 되었다.
냉전기의 가장 유명한 사례 중 하나는 영국 MI6 간부였던 킴 필비다. 그는 30년 가까이 KGB에 서방의 비밀을 제공한 이중간첩이었다. 필비의 배신은 서방 정보기관에 치명타를 안겼다. 반대로 CIA 내부에도 구멍이 있었다. 앨드리치 에임스는 1980~90년대 KGB에 미국 요원의 명단을 넘겨 수십 명을 사형대로 보냈다. FBI 요원 로버트 핸슨 역시 장기간 KGB와 협력했다. 냉전의 첩보전은 이처럼 내부의 배신과 의심 속에서 더 치열해졌다.
냉전은 군사 정보뿐 아니라 정치 공작의 무대이기도 했다. CIA는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전 세계에서 비밀 작전을 펼쳤다. 이란의 모사데크 총리 축출(1953), 과테말라 아르벤스 정권 전복(1954), 칠레 피노체트 쿠데타(1973) 등은 모두 CIA의 그림자가 드리운 사건이었다. 반면 KGB는 서방 국가 내부의 좌파 세력, 반전 운동, 노동조합 등을 지원해 사회적 균열을 확대했다. 첩보전은 곧 심리전이자 이념전이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는 냉전 첩보전의 전형적 사례였다.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려던 계획은 미국의 U-2 정찰기와 CIA 분석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다. 이후 존 F. 케네디와 니키타 흐루쇼프의 극적인 담판으로 위기는 해소됐지만, 이는 ‘정확한 정보’가 핵전쟁을 막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기술 경쟁도 치열했다. 미국은 정찰 위성 ‘코로나 프로젝트’를 통해 소련 영토를 상공에서 촬영했고, NSA를 중심으로 글로벌 도청망을 구축했다. 소련은 방대한 인적 첩보망을 활용해 미국의 기술·정치 정보를 흡수했다. 한쪽은 기계와 과학에 의존했고, 다른 한쪽은 사람과 이념에 의존했다. 서로 다른 방식이었지만, 목표는 동일했다.
냉전은 결국 1991년 소련 붕괴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CIA와 KGB의 대결은 단순한 과거사가 아니다. 러시아의 FSB와 GRU는 여전히 미국과 서방을 상대로 첩보전을 벌이고 있으며, 냉전기의 경험은 각국 정보기관의 교본이 되었다.
냉전 시대 CIA와 KGB의 대결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눈에 보이는 군사력보다 무서운 것은 상대의 의도와 전략을 꿰뚫는 ‘정보’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전쟁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