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침투·심리전·사이버 공격까지…보이지 않는 전쟁은 지금도 진행형
[뉴스임팩트=박시연 기자] 한반도는 늘 냉전의 최전선이었다. 분단 이후 남북한은 정치·군사적 충돌뿐 아니라 은밀한 첩보전의 무대였다. 총성이 울리는 전쟁이 아니더라도, 보이지 않는 정보전은 수십 년간 한반도의 안보 지형을 흔들었다. 스파이 체포와 이중간첩, 잠수정을 이용한 침투, 해외에서 벌어진 정보전은 지금까지도 한국 현대사의 그림자 속에 존재한다.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후 남북한은 군사적 균형 속에서도 서로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첩보전을 강화했다. 북한은 대남 공작부대를 조직해 간첩을 남파했다. 이들은 위장 신분으로 한국 사회에 잠입해 군사 기밀을 수집하거나 사회 혼란을 조장하는 임무를 맡았다.
1960~70년대는 특히 남파간첩 사건이 빈번했다. 북한은 잠수정, 어선을 이용해 간첩을 남한 해안에 침투시켰고, 이들 중 일부는 군사시설 지도나 무기 개발 관련 정보를 빼내려 했다. 실제로 군과 경찰은 각종 간첩 검거 사건을 발표했으며, 이는 당시 한국 사회에서 ‘간첩’이라는 단어를 공포와 동일시하게 만들었다.
1968년 1월, 북한 특수부대원 31명이 청와대 기습을 시도한 사건은 대표적인 ‘그림자 전쟁’의 한 장면이다. 무장한 특수부대는 서울 한복판까지 잠입했지만 결국 군·경 합동 작전으로 대부분 사살되거나 체포됐다. 이 사건은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고, 이후 정보기관의 역할과 위상이 강화되는 계기가 됐다.
같은 해 1월에는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나포되는 사건도 발생했다. 이는 미국과 한국 모두에게 첩보 활동의 위험성과 필요성을 각인시켰다.
남북의 첩보전은 국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동남아시아, 일본, 유럽 등지에서도 양측 정보기관의 암투가 벌어졌다. 북한은 해외 교민 사회를 통해 첩보망을 운영했고, 남한 역시 재외공관을 활용해 북한 공작원을 추적했다. 냉전 구도 속에서 남북한은 각각 CIA, KGB 등 강대국 정보기관과 협력하거나 대립하며 글로벌 정보전의 한 축을 담당했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중앙정보부와 안기부다. 1961년 창설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는 북한의 간첩 활동에 맞서기 위해 조직되었다. 이 기관은 군사·외교 정보 수집뿐 아니라 국내 보안과 대공(對共) 수사까지 담당하며 사실상 ‘국가 안보의 방패’ 역할을 했다. 이후 안기부로 개편되면서도 대북 정보전에 집중했다.
한국의 정보기관은 해외에서 북한 공작원을 색출하고, 국내 침투 간첩을 체포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정치 개입 논란을 낳기도 했다. 이처럼 대북 첩보전은 한국 현대사의 양날의 검이었다.
1990년대 이후에도 북한의 침투 시도는 계속됐다. 1996년 강릉 잠수정 사건은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한국 해안에 침투했다가 좌초한 대표적 사례다. 이 과정에서 격렬한 수색전이 벌어졌고, 한국군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또한 2000년대 들어서는 전통적 남파간첩 대신, 위장 망명자나 인터넷을 통한 정보 수집 등 방식이 진화했다. 일부는 한국 사회에 장기간 잠입해 군사·산업 정보를 빼내려 했으며, 실제로 간첩단 검거 사건이 여러 차례 공개돼 한국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물리적 침투뿐 아니라 심리전도 치열했다. 한국은 대북 확성기 방송과 전단 살포를 통해 북한 체제의 약점을 겨냥했다. 북한 역시 대남 방송과 대남 선전 매체를 운영하며 체제 선전을 이어갔다. 이 심리전은 총탄 한 발 쏘지 않고도 상대 체제의 약점을 파고드는 ‘정보 무기’였다.
냉전이 끝난 뒤에도 남북한의 첩보전은 멈추지 않았다. 과거 무장공비의 총기와 폭탄이 오늘날에는 해킹과 사이버 공격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북한은 사이버 부대를 활용해 한국 정부기관과 금융망을 공격하고 있으며, 이는 첩보전의 최첨단 전선으로 평가된다.
남북한의 첩보전은 단순한 영화적 상상이 아니다. 지난 수십 년간 실제로 존재했고, 오늘날에도 형태를 바꿔 계속되고 있다. 남과 북은 서로를 향해 총부리 대신 정보전을 겨누며, 보이지 않는 그림자 속에서 한반도의 안보 균형을 시험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