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가 관행과 다른 삼성·현대가의 신선한 선택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통해 우리사회 신뢰 회복
[뉴스임팩트=이정희 기자]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2차 세계대전 당시 18세의 나이로 왕실 최초로 여성 보조운전병이 되어 군복무를 수행했다. 영국 국민은 전쟁의 고통을 함께 나눈 군주를 통해 지도층의 ‘책임 있는 행동’이 무엇인지 생생히 목격했다. 이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즉 ‘특권은 책임을 동반한다’는 고전적 원칙의 모범 사례로 지금도 회자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이 개념은 오랫동안 공허한 구호에 그쳤다. 재벌가와 정치권 자제들은 병역 회피와 특혜의 상징이었다. 건강 문제, 해외 유학, 특례 복무 등 다양한 사유가 동원되었고, 일부는 제도적 허점을 활용해 단기간 복무로 전역하기도 했다. 병역은 서민과 중산층의 몫으로 전가되고, 특권층은 국민의 의무를 피해가는 모습이 반복됐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최근 등장한 사례들이 사회적 주목을 받고 있다.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의 장남 이지호 씨가 대표적이다. 그는 선천적 미국 복수국적자로 병역 면제를 받을 수 있었지만,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해군 장교로 자원 입대했다. 39개월간의 복무를 선택한 그의 결정은 단순히 법적 의무를 넘어, 특권층도 국민과 같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현대중공업 창업주 정주영 회장의 손자 정기선 현 HD현대 수석부회장도 주목받는 사례다. 현대가 3세인 그는 해외 유학과 특혜의 길을 택할 수도 있었지만, 일반 국민과 동일한 절차로 군복무를 마쳤다. 재벌가 자제가 흔히 택하던 ‘회피의 길’ 대신, 국민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한 그의 선택은 희소성과 상징성을 동시에 지닌다.
이들의 사례는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희귀했던 ‘특권층의 의무 이행’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냉정히 보면, 몇몇 개인의 예외적 선택이 구조적 불평등을 바꿔놓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재벌가와 정치권 자제 다수는 면제, 단축 복무, 해외 체류 등 다양한 방식으로 병역을 회피하고 있다. 이지호·정기선 씨의 군복무가 언론의 대서특필 대상이 되는 현실 자체가 한국 사회 특권 구조의 왜곡을 반증한다.
해외 사례는 더욱 시사적이다.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아들 쿠엔틴, 케네디 대통령의 맏형 조지프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한국전쟁 당시 밴플리트 사령관의 아들은 전투기 임무 중 실종됐다. 지도층 자녀들의 희생은 미국 사회에 깊은 울림을 남겼고, ‘책임 있는 지도층’ 전통을 굳혔다. 영국 왕실과 귀족가문들도 마찬가지로 1·2차 세계대전에서 앞장섰다. 이들 사회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일회적 예외가 아니라 제도와 문화 속에 뿌리내린 가치였다.
한국이 진정한 의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현하려면, 이 같은 해외 전통에서 배워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재벌가 자녀 몇몇의 군복무를 ‘이례적’이라 떠받드는 상황을 넘어, 특권층 누구나 당연히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제도적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병역 제도의 공정성 강화와 특혜 근절, 사회 지도층에 대한 투명한 검증 체계 확립이 그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일화처럼, 지도층이 국민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모습은 사회적 신뢰를 구축한다. 삼성가의 이지호 씨, 현대가의 정기선 씨가 보여준 군복무 사례는 한국 사회가 이제 막 그 길에 들어섰음을 알린다. 그러나 이 길이 진정한 대세가 되려면,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몇몇 개인의 상징적 선택이 아닌 특권층의 일상적 의무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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